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별초의 난 (문단 편집) == 평가 == 1차 교육과정 때는 그저 [[반란]]으로 여겼으나[* 일부가 굳센 고려 무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민족 항쟁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군사정권]] 시기인 2차 교육과정 시기 즈음부터 국난 극복의 항쟁 중 한 사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고려]] 무인의 조국 독립을 지키기 위한 민족항쟁"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었다고 한다.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6363804|#]] 군사정권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연구된 많이 미화된 평가라는 것인데 아직 대몽항쟁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는 경우도 많다. 원나라에게 저항했던 것은 맞는 사실이고, 각지의 농민과 노비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민의 저항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재평가의 필요성은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교과서에는 이를 반영해 대몽항쟁 외에 권력투쟁과 민의저항 등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려]] 관군은 삼별초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서남 해안의 모든 [[섬]]에 <공도령>(空島令), 즉 섬을 비우는 정책을 강제로 시행했다. 이 때문에 섬 주민들은 강제적으로 본토로 이주해야 했다. 게다가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공도령은 이어졌다. 이로 인해 한반도 남부에서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던 섬 지역의 문화들이 거의 소멸해버렸다. 특히 공도령을 처음부터 실시하지 않은 [[제주도]]나 <공도령>이 오래 지속되지 않은 [[진도군]], 대몽항쟁기 [[강도(고려)|고려 정부의 중심지]]이자 군사 요충지인 [[강화도]] 지역을 제외하면 제대로 섬 고유의 문화가 남은 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삼별초는 당시 [[탐라]] 주민들에게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삼별초]] 문서 참조. 뿐만 아니라 [[진도군|진도]] 주민들조차도 환영하지 않았음에도 [[배중손]] 사당이 있다. 그리고 막부에 지원군을 요청해서 오히려 지금은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가마쿠라 막부]]에 지원군을 요청한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하나 원종 자체도 외세인 원나라를 끌여들었다.[* 백제 또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 왜군을 끌어들인 역사도 있다.] 또한 삼별초가 섬주민들한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각지의 농민들과 노비들이 지지하고 참여한 부분도 있기에 민의저항 성격도 가지고 있다. 단순한 권력투쟁에 의한 반란으로 치부하기에는 복잡한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 삼별초의 난이다. [[전라도]]와 관련된 문제에선 이연년의 난에 대한 보복으로 [[전라도]]를 점거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삼별초의 경우는 이연년의 난을 진압한 지역인 [[나주]]를 공격하고, 오히려 이연년의 난의 중심지인 [[담양]]을 건드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정치 보복에 대한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시간차도 생각보다 많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역으로 삼별초가 [[최항]]을 옹립하고 [[김경손]]의 죽음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보면 [[김경손]]을 도운 쪽을 쳤다는 설도 있다. 생각보다 많은 추측이 오고가는 반란 중에 하나이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공경이었던 요시다 쓰네나가가 남긴 일기인《길속기》나 《[[고려사]]》 <반역 열전>에 삼별초의 수장들이 실렸다는 점에서 보면 반역자임은 분명하지만 애초에 [[원종(고려)|원종]]이 국내의 정적들을 자체적으로 제거하지 못했고, [[무신정권]]이 사라진 상황에서 [[삼별초]]와 같은 [[사병]]들을 중앙군에 편입시키기보단 오히려 그들을 버린 책임도 컸다. 한마디로 [[원종(고려)|원종]]은 '''[[외교]]로 탁월한 성과를 냈으나 내정에서 보여준 단점이 이 사단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삼별초]]가 [[최씨 정권|최씨 무신 정권]]에 결탁한 것은 사실이나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것도 [[삼별초]]라는 점에서 보면 [[원종(고려)|원종]]이 이런 격변기에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말도 안되는것이 [[원종]]이 아니라 다른 지도자였어도 삼별초는 제거대상 0순위였다. 현대의 입장에서 봐도 삼별초는 군가의 구낻가 아니라 최씨 정권의 친위대이자 사병이였고 주구노릇을 도맡아 했는데 주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바꾸어 버린 집단을 어떻게 [[신뢰]]한다 말인가? '''원종 입장에선 무력 좀 있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최씨정권]]의 잔존세력을 쓰느니 외세인 [[쿠빌라이 칸]]의 힘을 빌리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특히 무신정권은 군대를 철저하게 사유화하여 왕권을 크게 약화시킨터라 당시 원종이 삼별초를 자체적으로 제거하려고 해도 그럴만한 군사력이 없었다. 애초부터 원종이 임연한테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은것도 그를 제거할수 있는 군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이들 역시 본인들이 합법적으로 용서받고 중용될 길이 없단 걸 스스로 잘 알았기에 [[제주도]]까지 간 결사항전을 한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삼별초는 당대는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봐도 좋게볼수 없는것이 최씨정권의 주구 노릇을 하며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또한 반란을 일으켰을때 여성들을 겁탈하여 강제 결혼을 하고 왕명을 사칭하며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며 주민들을 착취하였기에 결코 미화될수가 없다. 그러니 삼별초가 고려와 몽골에게 토벌당하여 파멸한것도 결국엔 자업자득이자 인과응보라 할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